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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사고: 무엇이 무엇을 형성하는가?

by 인지언어 2025. 6. 17.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언어인지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오래도록 논의되어 온 주제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거나 제한한다는 입장부터, 사고가 언어를 이끈다는 주장까지, 학계에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언어가 사고를 형성하는지, 혹은 사고가 언어를 형성하는지를 둘러싼 주요 이론들을 살펴보고, 인지언어학적 관점에서 이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1. Sapir-Whorf 가설: 언어결정론과 언어상대주의

20세기 초 Sapir와 Whorf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주장하며 언어결정론(language determinism)과 언어상대주의(language relativity)를 제시하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범주화하는 방식을 구조화한다.

예컨대 호피어(Hopi)의 시간 개념이나 이누이트어의 눈을 지칭하는 다양한 단어들은 각각의 언어 사용자가 세계를 어떻게 개념화하는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주장은 사고가 언어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강력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2. 언어결정론에 대한 비판과 반례

그러나 언어결정론은 지나치게 강한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인간은 언어 외적인 방식으로도 사고할 수 있으며, 언어가 없는 유아도 개념을 형성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컨대 색채 인지에 관한 연구들은 언어가 색 범주화를 조정할 수는 있으나, 기본적인 지각 능력을 좌우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언어가 사고의 전제 조건은 아니며, 사고가 언어 이전에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3. 인지언어학의 중재적 관점

인지언어학은 언어와 사고가 상호작용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언어는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아니라, 개념 구조를 반영하고 형성하는 도구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형상 이론(image schema)이나 개념 은유(conceptual metaphor)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어떻게 구체적 경험으로부터 추상적 사고를 조직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는 사고의 틀을 제공하기도 하고, 사고의 산물이기도 한 이중적 관계에 있다.

 

4. 언어가 사고를 재구성하는 방식

언어는 사고의 표현을 넘어, 사고의 내용을 재구성하는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사적 장치나 담화구조는 발화자의 인지적 틀을 반영하며, 수용자의 해석 방식을 유도한다.

특정 문법 구조나 어휘 선택은 담화 내에서 특정 개념을 전면에 부각시키거나, 인과관계를 암시할 수 있다.

즉 언어적 선택은 사고의 강조점과 해석을 조절하는 인지적 프레임으로 작동한다.

 

5. 사고가 언어를 주도하는 사례

반대로 사고가 언어를 선행하거나 규정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신생어(new words)의 생성이나 은유의 창조적 사용은 화자의 사고 구조와 세계관이 언어에 반영되는 과정이다.

과학, 철학, 예술 영역에서는 기존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새로운 개념들이 사고에 의해 창출되고, 이후 이에 맞는 언어 표현이 만들어진다.

이는 사고가 언어를 확장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6. 신경과학적 관점에서의 통합적 해석

최근의 신경언어학 및 인지신경과학 연구는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보다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fMRI 및 EEG 연구에 따르면, 언어적 자극은 전두엽의 실행기능과 연계되어 사고 조작을 유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시각적 사고, 수리적 추론 등 언어 외적 사고 활동은 비언어적 네트워크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진다.

이는 언어와 사고가 별개의 경로로 작동하면서도 상호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상호구성적 관계로서의 언어와 사고

언어가 사고를 형성하는가, 혹은 사고가 언어를 형성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인지언어학의 관점에서 볼 때, 언어와 사고는 서로를 제약하고 확장시키는 상호구성적 관계에 있다.

특정 개념은 언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기도 하며, 동시에 사고의 창조성이 언어를 갱신하고 확장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관계는 인간의 인지 시스템이 가진 유연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한다.